내 카메리 온도는 39.5도
그를 만나자 마자 기자의 관심은 그것에 대한 것이었다. 사진작가가 베스트셀러를 낸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랜덤하우스에서 책을 냈다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다.
“책 부터 줘봐라, 책 중에서 발췌하여 써야 될 것들이 많을 것 같은데,....”
예의 게으름뱅이 기자의 버릇이 발동하는 순간 안타깝게도 책은 남아 있지 않았고 출판사에도 책은 없다는 대답이었다. 베스트셀러 작가를 함부로 취급하디니.....
박경일 작가와는 아주 오래된 인연이다. 그가 어릴 때 기자역시 어릴 때(?)였다. 우리 동아리(산영)엔 열정이 충만한 그와 그의 또래들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사진에 열을 올렸다. 39.5도는 당시의 체온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가 미국으로 사진공부를 떠나겠다고 선언을 했다. 주위에선 깜짝 놀랐고 모두 말렸다. 취미는 취미로 끝나야지 생을 다 걸고 사진밥을 먹기에 사진이란 세계는 너무나 험난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가 너무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철없다고 생각했다. 컴퓨터가 생소하던 시절에 그는 영국은행의 컴퓨터 담당자로 최고의 연봉을 받으며 아쉬울 것이 없는 엘리트 회사원이었기 때문이다. 목사였던 그의 아버님께서 내손을 부여잡고 우리아들 미국에 가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눈물로 하소연 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집불통!
그의 얼굴엔 그것이 깊게 새겨져 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버린 채 미국으로 건너갔고, 뉴욕인가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미국에서 고생한 사연은 사서한 고생이니 여기 기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신혼의 아내가 접시닦이로 학비를 대어 겨우 학업을 마쳤다는 것만은 풍문으로 들려왔다.
돌아와서도 그의 형편은 풀죽을 쑤어먹을 처지도 못되었다.
포트폴리오를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누구도 그에게 일을 주려 하지도 않았다. 몇 년이 흐른 뒤 충무로 옥탑방을 500만원에 10만원에 월세를 얻어 영세한 기업들의 광고 사진들을 찍어주곤 했지만 푼돈 외엔 도무지 앞이 보이질 않았다.
<첫번째 행운>
우연히 사진예술지 윤세영 편집장이 그의 포트폴리오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려 6페이지를 그에게 할애하면서 그의 인터뷰를 하기 위하여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찻집으로 따라온 한 사내가 있었다. 인터뷰를 끝낸 그를 그 사내가 붙잡았다.
“내 친구가 기업형 스튜디오를 차리는 중인데 그 곳에서 일을 하지 않겠나?”
그 사내는 유명한 평론가 진동선씨였다.
그 스튜디오의 실장을 맡아 많은 촬영을 소화해 냈다.
1년 후, 그는 독립을 결심하고 작은 스튜디오를 열었고 그 스튜디오로 내려가는 계단에 B2(지하2층)란 푯말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사업자 등록을 B2로 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업실은 위에 있든 아래에 있든 B2다.(지금까지 기자는 그 이름에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심오한 철학이 들어 있는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두번째 행운>
IMF사태 때였다.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쫓겼던가? 기자역시 김가중식 사진기술 포토테크니크란 정말 좋은 책을 냈지만 엄청난 구렁텅이로 빠졌던 뼈아픈 기억이 있다. IMF 몇 달 앞두고 새로 옮긴 넓직한 스튜디오에 뿌듯한 마음이 채 식기도 전에 심한 좌절을 맛봐야 되었다.
정적! 넓디넓은 스튜디오는 그야말로 죽은 듯이 조용했다. 전화통은 미동도 않고 그림처럼 조용히 앉아 있다.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옮겼나? 우울하고 적막한 크리스마스가 그렇게 지나갔다.
“여보세요, 한섬 홍보실인데요.”
“한샘이요?”
젠장 이제는 부엌가구라도 찍어 달라는 것인가?
“한샘이 아니고 한섬이요”
국내 작가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회사들이었으니 이름조차 생소한 것은 당연하다. 홍보실에 들어섰을 때 벽은 온통 그의 작품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동안 외국인 작가들과 외국인 모델로만 홍보사진을 찍던 기업들이 김가중의 주머니 속 같이 귀해진 달러 탓에 국내작가들에 눈을 돌린 것이다.
기업들의 눈에 차는 작가는 그 외에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 전화통은 오뉴월 맹꽁이 떼처럼 시끄럽게 울어 대었고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촬영을 해야만 되었다. 1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이제는 기업들도 더 이상 외국인 작가들만 찾으려 하지 않았고 사실 외국인 작가들에 비하여 국내 작가들의 수준이 떨어질리도 없다는 인식 탓에 그의 전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세번째 행운>
어느 날 부터 시간이 날 때 마다 누리끼리한 갱지에 무엇인가 끄적이기 시작하였다. 일기인지 자서전이지 애매한 그의 글을 랜덤 하우스 출판사에서 매우 흥미로워 했다,
베스트 셀러 “내 카메라온도는 39.5도” 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컴퓨터로 치지 않고 갱지위에 직접 쓴 이유는?”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하자
“나는 아나로그가 좋아”
연필로 촬영콘티를 직접 그린 갱지들을 잔뜩 꺼내 보여준다. 만화같은 이미지들이 빼곡히 갱지위에 꿈틀거린다.
“그럼 아직도 필름카메라 쓰나?”
“천만에 2004년부터 디지털 카메라 썼는데 그 이후엔 필름 카메라 써본 적 없어, 2004년엔 광고주들이 약 반수가 필름을 고집하더니 2005년 들어서부터는 100% 디지털 사진을 원 하더군”
그는 대학에서 전산을 공부하고 은행의 온라인 전문 엔지니어였기에 컴퓨터에 태생적으로 가까웠고 디지털을 일찍부터 누렸지만 의외로 자판대신에 지금도 갱지위에 연필로 글을 쓰고 콘티를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