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는 누구에게나 파도를 보여주지만, 한병률은 시간이 부서지는 소리를 보여준다. -
사진은 빛으로 그린다고들 한다. 그러나 한병률 작가는 빛보다 시간으로 사진을 그리는 사람이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아니라, 셔터가 열려 있는 긴 시간 동안 세상이 흘려보낸 숨결까지 한 장의 필름에 눌러 담는다.
그의 바다는 파도가 없다. 대신 시간이 흐른다. 거친 물결은 비단처럼 풀어지고, 포효하던 파도는 침묵이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앞에서는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내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한병률 작가는 국내 장노출 사진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수많은 후배 사진가들이 그의 작품을 통해 장노출의 세계에 입문했고, 그는 지금도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하며 장노출 사진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왜 아직도 필름카메라입니까?"
그는 망설임 없이 답한다.
"장노출은 아직도 필름이 가장 정직합니다."
디지털카메라는 장시간 노출 과정에서 이미지 센서가 열을 받아 노이즈와 스미어 현상이 발생하기 쉽다. 반면 필름은 긴 시간을 담아내면서도 빛의 결을 자연스럽게 품는다. 기술은 진화했지만, 긴 시간을 견디는 그릇만큼은 아직 필름이 가진 깊이를 쉽게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하지만 필름카메라라고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배터리에 의존하는 카메라는 긴 노출 도중 전원이 끊길 위험이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오롯이 기계의 힘으로 셔터를 지탱하는 기계식 필름카메라를 고집한다.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끝까지 버텨내기 위해서다.
사진은 결국 무엇을 기록하는가.
대부분은 찰나를 기록하지만, 한병률은 찰나를 버리고 시간을 기록한다.
누군가는 셔터 속도를 높여 순간을 잡으려 애쓰지만, 그는 셔터를 오래 열어 순간을 지워버린다. 그 역설 속에서 비로소 눈으로는 볼 수 없던 또 하나의 풍경이 태어난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 아니다.
시간을 견디는 자만이 시간을 찍을 수 있다.
한병률의 장노출은 그래서 기술이 아니라 수행이고, 촬영이 아니라 기다림이며, 풍경이 아니라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