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동굴
나도 아리안의 후예를 만난 적이 있다.
아다! 송일곤 감독이 소개해 준 이란계 처녀였다.
칸 영화제 대상 감독이 소개한 영화배우이자 모델이니 국제결혼 직전만큼 긴장했다.
처음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유전자는 진짜 사기 안 치는구나.'
눈빛은 사람을 해부했고,
콧날은 면도날보다 날카로웠다.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오히려 내가 피사체가 되어 박제될 뻔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기마민족을 따라 죽기 살기로 달리다 보니
이번에는 스키타이가 등장했다.
이 인간들은 더 심했다.
적을 죽이는 걸로도 모자라 머리 가죽을 벗겨 손수건처럼 들고 다녔다.
패션 감각도 참...
요즘 명품회사에서 출시했다가는 주가가 먼저 벗겨질 물건이었다.
그들에게 외교란 말발굽이었고,
평화란 상대가 다 도망가거나 지리멸렬한 상태를 의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땀에 절어 앞뒤분간도 못하고 무작정 달리고 있는 내 뒤에서 이상한 군대가 열을 지어 몰려왔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막북의 들개떼들과는 차원이 다른 잘 훈련되고 병법에 통달한 정예병들이었다.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무려 칠십만 대군을 끌고 스키타이를 정벌하러 왔다.
황제는 자신 있었다.
병력도 많고,
무기도 많고,
지도도 있었다.
문제는 딱 하나.
초원에는 주소가 없었다.
대한민국 비무장지대처럼 GPS도 먹통이다.
스키타이는 성이 없다.
궁전도 없다.
도시도 없다.
점령할 집도 없다.
말 위에서 밥 먹고,
말 위에서 자고,
말 위에서 사랑하고,
말 위에서 싸우고,
말 위에서 사라진다.
오늘 쫓아가면 내일은 삼백 킬로미터 밖이다.
백전백승 다리우스는 결국 평생 처음으로 바람에게 패배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헤로도토스는 멋있게 썼다.
"그들의 집은 바람을 따라 움직인다."
참 아름다운 문장이다.
하지만 김가중식으로 번역하면 간단하다.
""다리우스는 다리를 절며울며불며 초원을 헤맸다."“
그 순간 기마족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야."
"너도 이제 우리 편이다."
순간 잠이 깼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렀다.
창밖에는 울란바토르의 새벽.
그리고 오늘.
드디어 우리도 그 초원에서 옷을 벗고 역사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생각해 보니 참 이상하다.
나는 누드를 찍으러 몽골에 왔는데,
정작 벗겨지는 것은 모델들의 옷이 아니라 내가 믿고 살아온 문명이라는 껍데기였다.
인간 정신의 원초적인 핵심은 플라톤의 동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