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유산 완충지역 100미터에서 500미터 확대 논의를 바라보며…
[기고자] 국민의힘 종로구당원협의회 소상공인위원회 위원장 박병철
몇 해 전 오사카를 여행했을 때,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주말 아침이면 오사카성 주변을 조깅하는 주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성곽을 따라 걷는 가족들, 반려견과 천천히 산책하는 이웃들의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오사카성은 그들에게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 풍경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화유산을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도시가 주민에게 줄 수 있는 매우 큰 가치이자 혜택이라는 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장면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경복궁 주변을 달리는 시민들, 성곽길을 따라 걷는 산책 모임, 궁궐과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생활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다. 문화유산이 더 이상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걷고 머물며 숨 쉬는 생활 공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문화유산이 일상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반가운 변화다.
문화유산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일부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다. 그 주변에 사는 주민에게는 일상의 풍경이며, 도시 전체로 보면 모두가 함께 누리는 공공의 자산이다. 그렇기에 문화유산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우려가 생긴다. 최근 세계유산 완충지역을 기존 반경 100미터에서 500미터로 확대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다. 문화유산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취지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 제도가 실제로 시행될 경우, 그 영향은 단순히 문화유산 주변 경관에만 머물지 않는다.
완충지역이 일률적으로 확대되면, 세계유산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추가적인 건축 제한과 정비 지연을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미 오랜 시간 규제를 받아온 지역에서, 낡은 건물을 고치거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니다. 주거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뜻이고, 그 결과는 사람들의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이 떠나는 도시는 빠르게 활력을 잃는다. 상권은 위축되고, 관리의 손길은 줄어들며, 공간은 점점 낡아간다. 이러한 변화는 문화유산 보호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에서 문화유산은 결국 박제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건강하게 유지된다.
앞서 오사카성 주변의 풍경이 인상 깊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곳은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지만, 동시에 주민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성을 지킨다는 이유로 주변의 삶이 멈춘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재가 나란히 이어지고 있었다. 문화유산 보호와 생활의 균형이 무너진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지혜다. 전면적인 개발도, 전면적인 규제도 답이 될 수 없다. 문화유산의 핵심 가치와 경관은 엄격히 지키되, 그 보호 방식은 사람의 삶과 함께 숨 쉬어야 한다. 획일적인 거리 기준으로 규제 범위를 정하는 방식보다는, 유산의 성격과 주변 환경, 주민의 생활 여건을 함께 고려하는 세밀한 조정이 필요하다.
특히 세계유산 완충지역 확대와 같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 변화라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그 곁에 사는 사람들의 주거 환경과 삶의 가능성이 지나치게 제한된다면, 이는 지속 가능한 보호라 보기 어렵다. 문화유산 보호와 주민의 삶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설계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문화유산을 즐기기 시작했다. 걷고, 달리고, 머무르며 일상 속에서 향유하고 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분명하다. 찬란한 문화유산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삶의 질이 점점 더 나아지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포기해야 할 선택지가 아니라, 충분히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는 문제다.
문화유산은 지켜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다.
역사 도시는 과거를 바라보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삶이 이어지고 미래가 자라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문화유산도, 도시도 함께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