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08월15일mon
 
티커뉴스
OFF
뉴스홈 > 문화예술뉴스 > 전시회탐방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이현정 개인전 ‘팽이와 달’

갤러리호호
등록날짜 [ 2022년01월13일 14시36분 ]

이현정 개인전 팽이와 달갤러리호호

 

2022110일 부터26







 

삶 속에서 떠오르는 별세계 얼굴 예쁘네요!

 

김남수(안무비평)

 

#1. “영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모두 물질세계의 중력 법칙과 유사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은총만이 예외다.” (시몬 베유)

 

#2.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_김수영, 달나라 장난중에서

 

고독한 단독자로서 산다는 것은 우선 생존을 도모하는 일이 우선인 삶이고, 생존에 치우쳐서 자신의 존재의 품격을 갖추기 힘든 일일지 모른다. 가령, 돌고 있는 하나의 팽이는 누가 알지 못해도 그 회전력이 가져다주는 쓰러지지 않는 생존의 풍경이 얼핏 엿보인다. 그런데 팽이의 꼭대기 표면은 회전하는 밀도를 반영하는 동심원의 그림이 생겨나면서 가변한다. 이를 시인 김수영은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라고 봤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는 스스로 돌고 있다. 최초에는 누군가의 채찍질에 의해 돌았을지 모르지만, 이내 그 회전은 온전히 생존에서 생활로 탈바꿈하는 은유가 된다. 왜냐하면 돌고 있는 서슬에 팽이머리 위의 스크린에는 별세계의 새로운 환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비로소 존재의 품격을 갖추게 된다. 그것이 달[, Moon]의 얼굴이라고 보는 것이다. 리얼리즘의 세계로부터 팽이 각속도의 강렬한 힘, 즉 일종의 정동[情動, affect]에 의해 비로소 솟구쳐 올라 현현하는 그 무엇이다. 이를 시몬 베유는 중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은총이라고 봤다. 그리고 은총은 곧 창조하는 자의 자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현정 작가의 <김치>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흔하게 볼 수 있는 김치 한 포기를 그린 그림임에도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범상하게 보는 대상 세계의 풍경과 함께 작가 스스로 억압당하지 않은 무의식’(, 마테-블랑코)의 어떤 생명성의 징후가 드러나고 있다고 봤다. “도마 위에 척하니 올려놓은 김치가 꼭 내 신세 같았다라고 말하는 작가 자신의 감정이입[empathy]은 동일시이면서 동일시가 가져다주는 주어진 체제에 대한 파괴성(버틀러, 슈필라인)일 수 있다. 여기서 파괴성이란 형태나 윤곽을 시각적으로 변형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억압적 메커니즘을 건드리는 문제로서 파괴(+저항)를 통해 새로운 생성으로 가는 충동일 수 있다. 실제로는 종주먹 들이대듯 절규에 해당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면서 절규의 막간에는 김치가 익어간다고 할까. 익어가는 것 역시 파괴이다. 물론 이 파괴는 일종의 발효 공정 같은 것이어서 헝클어진 시간을 다시 풀어서 쓰기하는 시간이 흘러온다. <김치>라는 작품을 보는 동안, 관객은 이 여울처럼 흘러오는 시간 속에 어느덧 잠겨든다.

이 시간에 개입하는 것은 억압당하지 않은 무의식의 작동이 아닐까. 이는 억압적인 사회 속에서 아이롱으로 눌린 자아 아래로 여전히 살아야겠다라는 본능이 표출될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겠다라는 선한 영향력으로 나타난다.

 

#3. “이 연결된 것들을 새롭게 생의 에너지가 가득한 튼튼한 심장을 만드는 창조자의 위치에서 있는 내가 되어 나를 보고 싶었다.” (작가노트 2021.01.15.)

 

작가노트 <- 의미심장>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심장으로 다 알고 있다라는 비인과적 연결 내지는 자연지[自然智]를 암시하는 것은 <김치>가 사실 발효되는 그 미시적인 들썩임 속에서 차츰 심장으로 화현해가는 과정을 알아차리게 한다. 발효는 일종의 파괴로서의 생성이며, 그 과정에서 김치라는 대상은 오렌지빛의 새로운 색채, 달리 말하면, 팽이머리의 회전하는 스크린 속에 떠오른 별세계의 입구를 보여준다. 김치 한 포기의 좌우 배치는 마치 심장 같기도 하고, [] 같기도 하다. 이러한 단순한 이미지 연결은 의미심장한데, 왜냐하면 이 제시된 김치 그림이 무엇인가를 겪어낸 사람들 사이의 심장과 심장을 서로 묶어내는 일종의 인덱스 기호로 작용하기를 작가가 욕망하고 있고 실제로 그런 은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렌지빛의 인덱스 기호는 심장의 박동과 다른 심장의 박동이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린다”(이효석) 라는 어떤 긴박감 속에서 일어나지는 않지만, 김치가 팽이처럼 돌고 있는 가속도의 극한이 주는 밀도 속에서 문득 연결되고 맥놀이[脈動, Beat] 현상을 발생시킨다고 하겠다. “정말 속임이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는 행위에서 팽이머리의 스크린에는 오렌지가 춤추듯 새로운 톤이 비의[秘意]처럼 나타난다.

가령, 비행기를 타고 오른 하늘의 지평선, 지구의 표면에 해가 지고 있을 때, 그 선의 표면은 오렌지톤으로 흔히 불타고 있다. 이는 슈타이너가 본 색채의 신비주의 감각으로 따져볼 때, 녹색광선에서 출발한 색채가 퍼플톤이라는 목적론적 지향을 따라서 그 입구까지, 혹은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의 톤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독한 단독자가 타자를 보는 것은 또다른 고독한 단독자이다. 자아이면서 자아의 페르소나로 타자를 보는 것은 삶의 무게감에 휘청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밀화된 자신 속에서 자기자신이라는 윤곽이 찢어지며 다른 존재로 화할 임계점이 이미 잠재화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현정 작가의 <자화상>창조자의 위치에서 있는 내가 되어 나를 보고 싶다라는 욕망에 부합한다. 유년기, 성장기 그리고 결혼 생활.. 등등의 삶의 시간 동안 여성으로서 겪었던 사회적 불합리와 폭력, 트라우마가 있었지만, 그 그늘진 초상에서 그늘이 아니다. ‘그늘은 작가의 삶의 전기[轉機], 즉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품고 있는 우묵한 공간, 즉 달의 팽이 얼굴 혹은 팽이의 속도가 빚어낸 달의 측면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두움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일정[日精, The essence of the Sun]의 밝음을 내장한 탓일지 모른다. []은 물[, ]의 기호이며, 이 기호 한가운데 있는 이 다름아닌 일정이다. 반대되는 기호를 품을 수 있는 구조, 이것이 억압당하지 않은 무의식이 낳는 새로운 생성의 한 단면이다.

<자화상>에도 오렌지톤의 빛이 한 자락 감돌고 있어서 삶의 간난고초, 서러움 그리고 신산스런 정서 너머로 작가 자신이 나아가는, 혹은 역설적으로 존재의 격을 획득하는 표상 체계가 나타난다고 하겠다. 팽이가 맹렬하게 돌 때, 팽이머리 위의 스크린에는 모든 색채들이 한데 물질적으로 엉켜붙어서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혹은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의 상태가 된다. 그 상태에서 물질 내부에서 비밀스런 것들이 올라오듯 오렌지톤은 눈부시게 피어난다. 그때는 일종의 순간적 안맹[眼盲] 상태라고 할까, 너무나 가혹한 삶의 직접적 응시가 마치 태양을 한참 바라보다 보면 눈부심에 의한 명[, 햇빛 속의 어두움] 상태에 빠지듯이 멍하게 된다. 이때는 월정[月精, The essence of the Moon]이다.

해의 눈과 달의 눈[日月眼]을 하고서 김치 한 포기가 금방이라도 물이 뚝뚝 들을 듯한 그림을 본다. 모든 가능한 비판 이전에 행동하는 것 같은 태도의 김치. 그와 같이 항상 어둠 속에 내버려진 사람이라고 해도 행동할 수 있다. 모든 가능한 비판, 상식적인 비판에 선행하는 어둠 속에서의 결심, 저항 그리고 실행이다. ‘억압당하지 않은 무의식이다.

<변기 인간>으로서 작가 자신을 형상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팽이의 속도가 팽이 자체를 튕겨져 나간 것인가. 좌우간 이 팽이는 젠더 가변적인 사물이다. 하나의 타고난 성차가 아니며 다른 무엇인가로 규정지어지지 않은 성의 무한을 싸고 돈다고 할까. 간성 間性 intersex의 스펙트럼이 륜선 輪旋 부채처럼 펼쳐진다. 작가는 이 자유로운 륜선 부채의 0도가 한바퀴 돌아서 360도와 포개져 있는 몸을 보라! 라고 담담히 요구한다.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심미적으로 변형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의 서사적 장시[長詩] <씨발>과도 통하며, 언젠가 작가 스스로 페이스북에 올렸다는 작가 자신의 누드 사진 게재행위와도 상통한다고 본다. 이는 에로스가 들어갈 틈 없이 리얼한 신체의 제시이자, 리얼리티로서의 삶의 현현을 목도하라는 파괴성의 축제라고 할까. 몸 자체가 팽이이다. 맹렬하게 돌고 있는, 어두움[]과 밝음[] 사이에서 스스로 회전하고 있는. 이제 문을 열어야 한다, 아니 이미 열고 있다, 아니 열었다.

 

#4. 오류

 

벽을 잃어버린 문

문을 잃어버린 벽

 

넘나들기

자유롭기

 

2013. 7. 5(이현정 일기 중에서)

 

 

 

 

 

 

올려 0 내려 0
김가중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양한모 개인전 ‘떴다 떴다 비행기’ (2022-01-13 14:49:52)
민율 ‘휴식이 필요할 때 나의 리틀 포레스트’展 병원安갤러리 (2022-01-13 14:23:05)